1. 4.19 혁명 :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권위주의에 맞선 국민적 저항이 폭발하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은 사건이 바로 4.19혁명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국민 주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초기에는 민주적 리더십을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기 집권을 위해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했습니다. 이승만은 재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기 위해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세 번째 임기를 얻었으나, 국민들 사이에서 헌법을 무시한 정권이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정부 내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한국전쟁 이후 복구 과정에서도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에서는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이 속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며, 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선거는 철저히 조작되었습니다. 선거 당일, 정부는 경찰과 관권을 동원해 투표를 조작했습니다. 유권자들의 투표를 강제로 확인하거나, 유령표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부정행위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부 지역에서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마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권에 대한 항의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3월 15일 마산 시위 도중 경찰의 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국민적 분노를 더욱 자극했습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김주열의 시신은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끔찍한 상태였으며, 이는 정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김주열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시위는 마산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4월 19일,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인 대응은 국민적 저항을 더욱 키웠습니다.이승만정권의 부정과 폭력은국제사회에서도 비판을 받았습니다.특히 미국은 이승만 퇴진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며 혁명을 지원하는모습을 보였습니다.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적 요구와 국제적 압박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로써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으며 이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이끄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며 민주주의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군사 정권의 등장으로 단명하게됩니다.
2. 5.16 군사정변 : 군부의 집권과 새로운 질서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군사정변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5.16 군사정변은 민주주의의 단절이라는 부정적 측면과 경제개발을 시작한 전환점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혼재된 사건입니다. 4.19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면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이끄는 제2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이 시기는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였지만, 제2공화국은 심각한 내부적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 체제로 운영되었지만, 대통령과 총리 간의 권력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경제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실업률과 빈곤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정부는 명확한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부패한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국가를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군사정변은 새벽 3시경 서울로 진격한 군부 세력이 주요 정부 시설을 점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정변은 예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저항없이 권력을 내주었습니다. 박정희는 즉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정변 직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립해 행정부,입법부,사법부를 모두 통제했습니다. 국가 재건최고회의는 부패 척결, 정치 혁신, 경제 재건을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추진했으며 군사력을 증강하고 사회 전반에 군사적 질서를 도입했습니다. 군사정권은 언론을 통제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강력히 탄압했습니다.
3.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시작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 재건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계획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경제적 기적이라 불리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자 국가 경제 구조를 변화시킨 중요한 정책이었습니다. 전체 노동력의 70%이상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산업기반은 전무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원조가 경제의 중심이었고, 자립적인 경제운영이 불가능했으며 실업률이 높았고 국민 생활 수준은 낮았습니다.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발전을 주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경제 성장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정부 주도형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업 중심 경제에서 산업 중심 경제로 전환 시키기 위해 철강,기계,화학,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고 수출은 국력이다 라는 슬로건 아래 정부는 수출 주도형 경제로의 전환을 도모했습니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섬유,신발, 가발등 노동집약적 제품이있습니다. 또한 도로, 항만, 철도 등 인프라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 국가 간선 교통망을 구축해 물류 효율성을 높엿고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전력망을 확충하고, 수력과 화력 발전소를 건설했습니다.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동안 연평균 7.1%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1961년 약 80달러에서 1966년 약 130달러로 증가했습니다. 산업화가 가속되었고 중화확공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수출액이 1961년 약 3200만 달러에서 1966년 약 2억 5천만 달러로 급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