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 후기의 쇄국정책 : 외세의 침략과 독립의 위기
조선 후기의 쇄국정책은 국가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점차 외세의 침략과 국제 정세 변화로 인해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자국의 안정을 위해 외세와의 관계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서양 열강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압박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은 조선이 경험한 외교적 위기와 그로 인한 근대적 변화의 필요성을 촉발시켰습니다. 조선은 17세기부터 쇄국 정책을 강화하면서 외부와의 교류를 제한했습니다. 특히 조선은 일본과의 통상도 끊고, 중국과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국가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쇄국정책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국가가 내외부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에도 막부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조선과 무역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일본은 쇠국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와의 교류를 최소화하려했고, 조선 역시 일본과의 교역을 제한하면서 자국의 문화와 경제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결국 일본의 근대화와 아시아 내 세력 균형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19세기 초 서양 열강들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특히 1840년부터 영국과 프랑스,러시아 등은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조선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쇄국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외세의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2. 강화도 조약과 일본의 개입 : 국문 개방의 시작
1876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외세의 개입과 국문 개방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압박과 조선 정부의 외교적 대응이 결합된 결과물로, 이후 조선은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에 점차 노출되었으며, 이는 조선의 근대화와 외세의 침략을 이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을 벗어나 국제 사회와의 통상을 원했고, 이에따라 외국과의 교역을 개시한 후 조선도 일본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특히 조선이 개방하지 않는 항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이를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방문해 개항을 강요한뒤, 외교적으로는 서구 열강들 및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통상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한반도의 조선도 중요한 전략적 지역으로 간주하였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고,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해 조선의 개항을 강요한 것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사실상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체결되었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개방과 일본과의 무역을 위한 항구 개방을 명시한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하게 되었고,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3. 독립협회와 자주 독립의 꿈 : 대한제국 수립을 위한 노력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개 되었고, 그중심에 독립협회가 있었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수립의 기틀을 마련한 단체로, 조선의 정치,사회, 경제적 개혁을 목표로 활동하며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렸했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윤치호 등의 개화 지식인들과 관료들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들의 주요목표는 자주독립을 수호하고 국가를 근대화화여 외세로부터의 간섭을 막는 것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을미사변]과 1896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아관파천]은 조선의 주권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졌고, 독립협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등장했다. 독립협회의 첫 번째 상징적 활동은 독립문 건립이었다. 독립문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청산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언하기위한 기념물이었다.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두번째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조선 최초의 한글과 영문 혼용 신문으로 독립협회의 사상과 목표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이 신문은 민중의 계몽과 정치 참여를 독려하며 자주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외세의 침략과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고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셋째 만민공동회를 열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정치적 목소리를 낼수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는 조선 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민권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 받는다. 넷째 고종에게 헌의 6조를 올리며 국가운영의 투명성과 개혁을 요구했다. 이처럼 독립협회의 활동은 혁신적이었으나 보수세력에 의해 1899년 강제 해산 되었으나 이들의 노력은 근대적 정치의식을 심어주었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국민적 저항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체제가 수립될 수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