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제강점기 말기 : 전쟁과 식민 통치의 극한으로 치닫다
일제강점기 말기는 일본이 군국주의를 극대화하며 2차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기로, 조선은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철저히 이용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후,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확보에 주력했으며, 식민지 조선은 그 중심에 놓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목 아래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의 경제와 노동력을 전쟁 체제에 총동원 했다.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일본 본토의 자원 고갈은 심화되었고 조선의 자원과 인력을 대규모로 착취하게 되었다.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농업 공업,광업 등 모든 산업비 전쟁 자원 공급에 동원되어 조선인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쌀을 비롯한 주요 농산물은 일본으로 강제 수출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했다. 공출이라는 명목하에 농민들은 강제로 곡식을 바쳐야 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처벌을받았다. 가축역시 전쟁 물자로 징발되었고 농촌경제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조선인의 인적 자원 또한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남성들은 군인, 군속,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었다. 많은 조선인이 일본 본토와 전쟁지역으로 끌려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희생되었다.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위안부로 고통받았다. 일제의 잔혹성과 반인륜적 행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의 탄압이 극에 달했음에도,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국내에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 갔다. 농민 봉기와 노동 쟁의 등 민중의 저항도 활발히 일어났다. 해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을 조직했고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패망에 기여하며,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렸다.
2. 광복의 전환점 : 일본의 패망과 독립의 기회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위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었다. 미국,영국,중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회담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방침과 전후처리를 중심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모든 침략지에서 철수할 것을 명시했고, 이 결정을 통해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1945년 7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에선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독일의 패망 이후 일본에 대한 전략을 재확인하고, 전후 세계 질서를 구체화하기 위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근처 포츠담에서 다시 한번 회담을 열었다. 내용으로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 일본의 본토는 연합국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고 군사력 해체, 카이로 회담에 다뤘던 한국의 독립확정이 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항복을 위한 최후 통첩을 포함하고 있었고, 수용하지않으면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임을 경고받았다. 이후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투하로 14만명, 8월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 투하로 약 7만명이 사망하였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과의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격했다. 소련군의 압도적인 공세로 인해 일본 관동군은 괴멸당했으며,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2차세계의 종결과 35년간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순간을 맞이했다.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가 내걸렸고, 독립운동가들은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꿈을 품었다.
3. 광복이후 : 한반도의 분단과 새로운시작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은 조선에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한반도에 권력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치안과 행정이 마비되었으며 민중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구조와 체제가 한 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기쁨도 잠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미국,소련,영국은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을 논의하기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담을 열었다. 5년간 신탁통치를 시행하기로 합의했고 이에대한 찬반논쟁이 발상하며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946~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었지만 양측의 대립으로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미소공동회 실패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9엔으로 이관했고 유엔은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8월 15일 유엔의 지원으로 남한에서 총선거가 이루어졌고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9월 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한 공산주의 정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따라 한반도는 냉전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리전 무대가 되었고 양측 정부는 서로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적대감을 드러냈으며 이는 이후 6.25전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