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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경제적 착취 : 일본의 자원 수탈과 무단통치[1910년대]

by 세상정보수집가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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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총독부 설치와 무단통치 체제

1910년 10월년,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총괄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립했다. 초대 총독으로는 일본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임명되었으며, 이후 총독은 항상 일본의 고위 군인이 맡았다. 이는 조선 지배가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총독부는 행정,입법,사법권을 모두 독점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이는 식민 통치 아래 조선인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조선총동부는 일본 군부의 통제 아래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조선인을 억압하고 일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일제는 조선 전역에 헌병을 경찰 체제를 구축하고 헌병과 경찰을 통해 민중을 철저히 감시하고 억압했다. 신문,잡지등 모든 매체를 검열하고, 조선의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절 발행되던 대부분의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다. 또한 집회와 결사를 철저히 금지 시키고 사소한 일상까지 간섭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인 교사들이 칼을 차고 학교에 들어가게 했으며,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 법률을 제정했다. 교육현장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일본에 대한 충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소한 법 위반에도 조선인에게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고, 반대로 일본인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이 이루어졌다.

2. 경제적 수탈과 민중의 피폐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 지배를 체계적으로 확립하기위해 토지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사업의 표면적인 목적은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세금을 공정하게 부과하기 위함이였지만 실질적 목적은 조선의 토지를 효율적으로 수탈하여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하고, 식민지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데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전역에서 이루어 졌으며, 모든 토지 소유권을 조사해 문서화 하는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한국 농민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관습적인 토지 소유권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문서로 입증되지 않는 토지를 무주지로 간주해 국가 소유로 편입했다.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빼앗겼고, 일본인 지주와 관료가 이를 차지했다. 일본은 대지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지주 중심의 소유권 구조를 강화했다. 이는 조선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농민들은 생산량의 50%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으며, 이는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생산된 쌀은 대규모로 반출하여 일본의 식량 문제를 해결했으며, 조선 농민들은 기아와 빈곤에 허덕였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풍부한 자원을 일본경제에 뒷받침하기 위해 철저히 수탈했다. 금,은,석탄 등 조선의 주요 광물 자원은 일본 자본이 독점적으로 채굴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며, 광산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수공업과 농업은 일본의 산업화에 밀려 쇠퇴하고 일본의 상품이 조선 시장을 장악하면서, 조선 내 자립적 경제활동이 위축되었다.

3. 독립운동의 태동 : 민족의 저항과 희망

1900년대 초반부터 이어져 온 의병운동은 1910년댕도 계속되었다. 토지 조사사업과 경제적 착취로 고통받던 농민들이 의병활동에 가담하였으며 의병들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총독부를 공격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무단통치와 탄압으로 활동이 제한되었고 이들은 해외에서 무장 투쟁을 준비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형태를 모색했다.만주,연해주,상하이,미국,일본 등 해외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며 민족 해방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마주와 연해주는 조선인이 대규모로 이주한 지역으로,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회영,이상룡 등의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 지역에 신흥강습소[훗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또한 의열단과 같은 무장 단체가 결성되어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활동을 전개하며 강력한 저항의지를 보여주었다. 상하이는 독립운동의 외교적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독립 운동가들은 상하이에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필요성을 알리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지역은 특히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기반이되었다. 미국과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며 중요한역할을했다. 1913년에는 흥사단이 조직되어 민족 교육과 계몽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한인들은 각종 모금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종교계와 지식인, 청년계층들의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데도 중요한역할을 했다.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가 일제에 맞서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에 동참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초기 단계로,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내에선 일제의 강압적 무단통치와 감시로 민중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나타났고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의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고 상호 연계가 부족한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고하고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조선 민족의 저항 의지가 계속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시기의 노력은 1919년 3.1운동으로 폭발하며,독립운동의 방향성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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