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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유화 정책과 숨겨진 억압 : 문화통치 속 조선,민중의 저항과고난

by 세상정보수집가 202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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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통치의시작 : 3.1운동 그리고 일제의 통치 전략 변화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개된 대규모 민족 운동으로,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헌병 경찰체제를 통해 조선을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언론과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경제적 자립을 막으며 사회적 불만을 키웠다. 또한 이 시기는 제 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이는 식민지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 민중 역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1919년 1월엔 고종 황제가 서거하면서, 그의 죽음이 일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조선 민중의 분로를 촉발시켰으며, 고종의 장례식은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919년 2월8일 도쿄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독립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월1일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독립선언 직후, 서울의 탑골공원과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전국 200여 곳으로 확산되었으며, 약 1500만명이 참여한 것이로 추산된다. 이러한 운동은 조선 민중이 하나로 결집하여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사건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3.1 운동은 일제 통치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일본은 조선 민중의 폭발적 저항에 위기감을 느꼈으며, 국제연맹 가입과 함께 국제적 이미지를 고려해야 했고 무단 통치의 폭압성 완화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문화통치라는 명목 아래 조선을 정치, 경제,문화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2. 유화정책의 실상 : 교육,언론,경제를 통한 은밀한 지배강화

1920년대 일제는 3.1운동 이후 강압적인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이를 완화하는 형태의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표면적 정책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는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통치 전략이었다. 일본은 교육,언론,경제적 정책을 통해 조선을 더욱 은밀하고 교묘하게 억압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인의 독립운동 의지를 약화시키고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했다.

 

경제적지배 : 착취와 종속 구조의 심화

1920년 일본은 자국의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도입했다 이 계획은 조선 농민들에게 고수익 작물 대신 쌀 지배를 강요했으며, 생산된 쌀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탈되었다.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수탈로 인해 빈곤과 고리대금에 시달렸다. 일본의 대지주 중심 정책으로 인해 소작농 비율이 급증했고, 농민들은 생산물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상납해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 교육정책 : 우민화와 친일 교육의 이중 전략

일제는 조선인 교육을 대폭 개편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이를 통해 초등 교육과 중등교육을 확대하는 한편, 고등교육 기회를 일부 제공하는 척하며 조선인의 불만을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조선인을 철저히 우민화하고, 일본에 종속된 신민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 학교의 설립을 늘리고 의무교육을 확대했으나, 교육의 중심은 일본어와 일본역사였다.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정당하다는 내용을 교육에 포함시켰다. 중등학교와 고등학교는 조선인에게 제한적으로만 입학 기회를 주었다. 조선인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는 실질적으로 일본인의 지배를 보조할 하급관리와 기술직 노동자를 양성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고등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인의 입학이 우선시되었으며, 조선인의 입학은 제한적이었다.

 

- 언론 통제와 문화지배 : 자유의 허울 속 검열과 억압

일본은 겉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듯 했으나, 실질 적으로는 철저한 검열과 통제를 통해 여론을 장악했다. 1920년대에는 민간 신문이 발행될 수있었고,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검열을 통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나 민족주의적인 내용을 삭제했으며, 경우에 따라 발항 자체를 금지했다. 모든 출판물은 일본 총독부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은 금지되었다. 반면 일본 식민통치를 미화하거나, 조선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내용은 적극적으로 유포되었다. 또 일본은 조선 내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억제하고 일본어와 일본 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활등을 강요했다. 이는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종속을 유도학 위한 것이었다.

3. 조선 민중의 저항 : 물산장려운동과 사회운동의 확산

1920년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민족적 자각이 고조되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시기였다. 물산 장려운동은 당시 경제적 자립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대표적 운동으로, 조선인의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 장려운동은 "우리가 만든 것을 쓰자"는 구호 아래 국산품 애용을 촉진했다. 이후 평양을 넘어 경성,대구 부산 등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동시에 192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 다방면에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운동이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의 운동들은 이후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민족적 자각을 고취하는데 큰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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